잊고 있던 기억이 쏟아집니다 | playlist
도쿄 서쪽, 이노카시라 공원의 뒤편은 늘 수면 아래처럼 고요했다. 여름이 끝나간다는 것은 매미 소리가 둔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어디로도 가지 않을 서류를 분류했고, 저녁이면 아무도 읽지 않을 인쇄물 위에 잉크를 덧입혔다. 세상의 속도를 아주 조금 늦추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일에 값을 치르지 않았으므로, 내 생활도 그만큼 얇고 투명했다. 그날도 비린 풀 냄새가 섞인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맨션의 좁은 계단을 내려오는데, 낯선 여자가 내 우편함 앞에 서 있었다. 베이지색 리넨 셔츠를 입고 있었고, 깃 언저리에서 백합 냄새가 났다. 오래 닫힌 방 안에서 혼자 시들어간 백합의 냄새였다. 여자는 자신을 아사미라고 했다. 얕은 바다. 빠져 죽기에는 얕고, 무언가를 가라앉혀 두기에는 모자라지 않은 깊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이 흘린 것을 돌려주러 왔어요." 그녀가 내민 것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안에는 물이라기에는 결이 이상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당신의 지난봄입니다." 내일 날씨를 알려주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봄 같은 걸 흘린 기억은 없는데요." "잃어버린 것은 원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물건을 주인에게 가져다줄 뿐이에요." 사기꾼이거나,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외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골목들의 이름을 차례로 읊었을 때, 가슴 안쪽의 얇은 막이 팽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달력이 떠올랐다. 4월과 5월이 이상하리만치 깨끗했다. 약속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두 달 동안 무엇을 먹고 누구와 나란히 숨을 쉬었는지에 대한 감각이 통째로 없었다. 지우개로 문지른 자리처럼 허옇게 일어난 공백. 나는 그것을 오래 과로 탓으로 여겨왔다. 아사미는 함께 걷기를 원했다. 우리는 목적지 없이 키치조지의 뒷골목을 걸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담장 아래 철 지난 수국이 그녀의 그림자에 닿자마자 하얗게 바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꽃이 마르며 내는 파스스한 소리가 너무 또렷해서, 환각이라고 부르기가 어려웠다. "사람은 무언가를 잃을 때 두 가지 중 하나를 해요." 그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자기를 부수거나, 상대의 흔적을 지우거나." "나는 어느 쪽이었습니까?" "당신은 뒤쪽이었어요. 아파서, 그 사람과 지낸 계절을 통째로 도려내 버렸죠." 말투는 차가웠는데, 어쩐지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낡은 찻집에 들어갔다. 주문한 보리차는 얼음이 다 녹기도 전에 미지근해졌다. 아사미는 유리병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았다. "이걸 마시면 그 사람이 돌아와요."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정확히는, 그 사람을 잃은 통증이 돌아오는 거겠지만요." "그 사람의 이름은 뭐였습니까?" "모릅니다. 저는 배달을 할 뿐,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아요." 나는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액체의 표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지금의 나보다 아주 조금 다른 각도로 슬픈 얼굴이었다. 지워진 기억이 나를 살려두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통증을 되마실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텅 빈 채로 사는 일은 뼈대만 세워둔 집 안을 가구도 없이 서성이는 일과 같았다. "마시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봄은 버려집니다. 주인을 잃은 계절은 썩어서 비가 되고, 언젠가 이 도시의 아스팔트 아래로 스며들겠죠." 아사미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는 백합 냄새가 남아 있었다. 나는 혼자 남아 병을 쥐었다. 유리는 사람의 체온보다 훨씬 차가웠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찻집 안의 소리가 한꺼번에 멎었다. 창밖을 지나던 자전거도, 빛 속에 떠 있던 먼지 한 톨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알았다. 아사미는 내가 앓고 있는 병이 잠시 사람의 모습을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깊은 이별을 겪은 사람만이 자기 자신에게 보낼 수 있는 심부름꾼이라는 것을. 나는 마개를 열고 액체를 목으로 넘겼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다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감촉이, 오래 혼자 있던 사람의 손 같았다. 곧 머릿속으로 파도가 밀려왔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역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긴 그림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서늘한 온기. 이름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고 얼굴도 흐릿했다. 그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만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번졌다. 정적이 깨지고 벽시계의 초침이 다시 움직였다. 창밖에 아사미는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유리병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내 셔츠 깃에서, 그녀가 남긴 것과 같은 백합 냄새가 옅게 났다. 나는 이제 내가 왜 매일 아침 어디로도 가지 않는 서류를 분류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잃어버린 사람의 흔적을, 도려낸 계절의 한 페이지를 나도 모르게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집에 닿기 전에 비가 왔다. 여름의 끝에 오는, 철 지난 봄비였다. 나는 우산을 펴지 않았다. ---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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