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닭맨의 여정] 민주공원 겹벚꽃 그리고 안창마을의 오리고기 (1)

** TTS를 활용한 목소리입니다. ** 일상을 기반으로 한 소설입니다.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 피어난 핑크빛 제1장 : 핑크빛 꽃비 속의 약속 1. 도시의 속도를 멈추는 방법 "도시의 속도는 말이야, 언제나 인간의 호흡보다 빠른 법이지." 등산배낭의 가슴 끈을 단단히 조여 매며 큰형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서면의 빌딩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뿌연 열기와 쉴 새 없이 바퀴를 굴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으로 향해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 숨 막히는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매일같이 땀을 흘리며 버텨온 우리였다. 모두가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뛰고 있지만, 정작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사치에 가까운 나날들이었다. "맞습니다, 형님. 그래서 우리가 오늘 여기 모인 거 아닙니까? 흙길을 좀 밟아줘야 아, 내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구나 뇌가 인식을 하거든요." 내가 배낭 옆 주머니에 터질 듯이 밀어 넣은 매운맛 볶음면 컵라면을 툭툭 치며 호기롭게 웃자, 옆에 있던 동생이 대뜸 내 별명을 부르며 끼어들었다. "아이고, 우리 불닭맨 형님은 여기까지 와서도 그 매운 걸 포기 못 하십니까? 이름값 한번 화끈하게 하십니다, 진짜!" "너는 임마, 이 불닭맨의 영혼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직도 몰라? 이 화끈함이 없으면 산을 탈 에너지가 안 생겨요, 에너지가!" 내 외침에 곁에서 등산 스틱을 점검하던 누님이 화사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봄볕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누님의 등산복 위로, 벌써부터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연분홍빛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부산의 영주동 산자락, 바로 현대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민주공원의 초입이었다. 가마솥을 닮은 산들이 푸른 바다를 포근하게 품고 있는 이 경이로운 도시는, 화려한 해안선과 마천루의 그늘 뒤로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산길을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네 사람은 수정산과 엄광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그 특별한 여정에 발을 내딛기로 약속한 참이었다. "자, 다들 준비됐으면 출발하자고. 오늘은 지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급하지도 않게, 딱 우리 발걸음 속도로 걷는 거다. 도심 속 숨겨진 낙원이 저 위에 있으니까 말이야." 큰형님의 멋진 출사표와 함께, 우리는 드디어 핑크빛 꽃비가 내린다는 천국을 향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2. 봄의 지각생, 주인공을 만나다 "와…… 형님, 누님! 저것 좀 보세요! 이게 도대체 다 뭡니까?" 동생이 가장 먼저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공원 진입로에 들어서자마자 머리 위를 가득 뒤덮은 것은,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하얗고 가녀린 일반 벚꽃이 아니었다. 3월 말이나 4월 초에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던 그 지각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었다. "이게 바로 겹벚꽃이라는 거다. 봄의 끝자락에 신이 숨겨둔 가장 화려한 선물이지." 큰형님이 인문학적 감성을 듬뿍 담아 설명했다. 과연 그랬다. 일반 벚꽃이 단판화로 청초하고 쓸쓸한 느낌을 준다면, 눈앞의 겹벚꽃은 꽃잎이 수십 장씩 겹쳐 피어올라 마치 작은 장미나 카네이션 수천 송이를 나무에 무더기로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색감 또한 연한 분홍빛부터 내 심장을 자극하는 진한 핫핑크까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불닭맨 형님 좋아하는 매운 양념 색깔 같은 꽃도 있네요!" "야, 동생아! 이건 매운 색이 아니라 로맨틱한 진분홍색이야! 낭만을 파괴하지 마라!" 내가 핀잔을 주자 누님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불닭맨 동생 말이 맞아. 이렇게 풍성하고 예쁜 꽃 터널은 나도 살면서 처음 봐. 어머, 저기 좀 봐. 정말 하늘이 하나도 안 보이네." 누님의 말대로 고개를 드니, 빽빽하게 들어찬 분홍빛 꽃지붕이 하늘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바람이 한 자락 불어올 때마다 그 무거운 꽃송이들이 가볍게 흔들리며 무게감을 이기지 못한 꽃잎들을 툭, 툭 떨어뜨렸다. 일반 벚꽃잎이 눈송이처럼 사르르 날린다면, 이 겹벚꽃잎은 마치 분홍색 깃털이나 두툼한 눈송이가 떨어지는 듯 묘한 입체감이 있었다. "누님, 거기 가만히 서 계셔보세요. 머리에 꽃잎 떨어졌습니다. 사진 한 장 박아드릴게요!" 내가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들자, 누님은 수줍게 포즈를 취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돗자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예쁜 시밀러 룩을 맞춰 입은 젊은 연인들이 공원 잔디밭과 산책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서로의 머리카락에 붙은 진분홍색 꽃잎을 다정하게 떼어주는 연인들의 모습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였다. "참 좋을 때다. 안 그러냐, 불닭맨?" "형님,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우리에겐 잠시 후에 마주할 오리고기와 막걸리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녀석, 역시 불닭맨답게 결론은 늘 화끈하고 확실하구나." 큰형님은 털털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우리는 벤치에 잠시 앉아 땀을 식혔다. 눈앞에는 팝콘처럼 터진 분홍빛 꽃들이 가득했고, 고개를 조금만 돌리자 저 멀리 부산항대교와 원도심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산과 바다, 그리고 꽃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 이 비현실적인 뷰는 오직 이곳 부산 민주공원에서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 3. 역사의 그늘과 꽃의 위로 민주공원은 단순히 꽃 구경이나 하러 오는 유원지가 아니었다. 공원 중앙에 우뚝 솟은 민주항쟁기념관의 촛불 형태 조형물을 바라보며, 큰형님의 목소리는 다시금 진중해졌다. "얘들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은 알고 걸어야 한다.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 그리고 6월 민주항쟁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꿨던 부산 시민들의 숭고한 피와 정신이 서린 곳이 바로 이 민주공원이야." 큰형님의 말씀에 장난기 가득했던 동생도, 사진을 찍던 누님도 숙연한 표정으로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이 가파른 산복도로 위, 고지대에 위치한 엄숙한 역사의 공간이 해마다 4월이 되면 이토록 화사한 분홍빛 위로를 건네는 명소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기온이 낮아 꽃이 늦게 피는 대신, 유난히 촘촘하고 선명한 색을 자랑하는 이 겹벚꽃들은 어쩌면 그 옛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외치던 이들의 뜨거운 염원이 꽃으로 피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자, 이제 꽃 구경으로 눈 정화도 했고, 영혼의 위로도 받았으니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여볼까?" 큰형님이 배낭을 다시 고쳐 매며 엄광산으로 이어지는 이정표를 가리켰다. "형님, 드디어 본격적인 레이스입니까?" "그래, 불닭맨. 네 그 매운 열정을 쏟아부을 가파른 능선이 기다리고 있다. 안창마을의 고소한 냄새가 우리 코를 자극할 때까지, 단 한 명도 낙오 없이 걷는 거다!" "좋습니다! 출발!" 우리는 민주공원의 핑크빛 터널을 뒤로하고, 푸른 생명력이 넘실거리는 엄광산의 울창한 숲길을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 제2장 : 거친 숨소리와 푸른 능선 1. 수정산 임도, 초록의 터널을 걷다 민주공원의 분홍빛 지붕을 벗어나자마자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겹벚꽃의 화사한 향기 대신 코끝을 훅 찌르고 들어온 것은 빽빽한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알싸한 피톤치드 향이었다. 우리는 엄광산과 수정산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이어지는 수정산 임도에 진입했다. "아이고, 형님들! 아까 평지 걸을 때는 좋았는데, 역시 산은 산입니다. 초입부터 경사가 은근히 사람 잡습니다!" 동생이 벌써부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며 엄살을 부렸다. 과연 그랬다. 완만한 데크길이 조성된 산복도로 코스와 달리, 본격적인 능선으로 향하는 진입로는 다리의 근육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 만큼 경사도가 있었다. "동생아, 벌써 지치면 어떡하냐? 이 불닭맨 형님을 봐라. 이 정도 고개는 매운 라면 국물 한 모금 마시는 것보다 가뿐하다!" 내가 가슴을 쫙 펴고 호기롭게 앞장서자, 뒤에서 묵묵히 다리의 리듬을 유지하며 걷던 누님이 웃으며 부채질을 해주었다. "우리 불닭맨 동생은 이름처럼 지치지도 않네. 그런데 얘들아, 양옆을 좀 봐. 도심 한가운데 이런 울창한 숲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믿어지니?" 누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십 년은 족히 자랐을 법한 나무들이 좌우로 도란도란 늘어서서 하늘을 가리는 초록빛 터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발밑에서 밟히는 흙은 폭신했고,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사귀 소리가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대도시 부산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이곳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대자연의 품 그 자체였다. "자, 다들 호흡 조절하고. 산을 오를 때는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면서 일정한 리듬으로 걷는 게 중요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 전에 미리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것도 방법이지." 큰형님이 대열의 맨 뒤에서 든든하게 중심을 잡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의 오랜 등산 내공이 묻어나는 조언 덕분에, 우리는 흐트러지던 걸음걸이를 다시 정렬하고 숲의 리듬에 몸을 맞추기 시작했다. --- 2. 삼각점을 지나 엄광산 정상으로 수정산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걸었을까, 이정표에 ‘삼각점’이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지형의 높낮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되는 이곳에 다다르자, 사방으로 막혀 있던 숲길이 조금씩 열리며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와, 시원하다! 형님, 여기서 잠시 물 좀 마시고 가시죠!" 동생이 배낭을 내려놓으며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역시 배낭에서 시원한 생수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의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주는 듯했다. 땀에 젖은 등산복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세상 그 어떤 에어컨 바람보다 달콤했다. "불닭맨, 너 아까 배낭에 챙긴 그 매운 컵라면은 언제 먹을 거냐?" 큰형님이 내 배낭 옆구리에 꽂힌 라면을 보며 장난스런 눈빛을 보냈다. "에이, 형님! 그건 엄광산 정상에서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먹어야 제맛이죠. 식어버린 도시를 향해 이 불닭맨의 매운맛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하하! 녀석, 컨셉 확실해서 좋다. 그래, 정상이 멀지 않았으니 힘내서 올라가 보자고." . . . 3. 360도 파노라마, 부산을 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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